다섯 살 손자가 살아갈 세상
연초에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2019년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리처드 파워스의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이라는 제목입니다. 기후위기에 직면한 가까운 미래,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파괴된 행성에서 살아가는 가족과 미래 세대의 불안을 그린 작품입니다. 책 속에는 우주생물학자 아버지와 동물권활동가 엄마를 둔 아홉 살 소년 로빈이 등장합니다. 야생동물 도감을 보면서 동물 이름을 외우고, 멸종 위기 동물을 그럴 듯하게 그리고, 개울에선 갑각류 놀이로, 산에선 별을 관찰하는 로빈의 모습을 보면서 다섯 살 손자 녀석을 떠올렸습니다. 조합하기도 어려운 공룡 이름을 척척 외우고, 도롱뇽과 낯선 곤충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손자의 몇 년 후 모습이 로빈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첫째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 숲체험 학교를 함께 간 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환경운동을 한다는 아버지를 따라 강연장과 집회 현장을 누비던 딸이 스스로 신청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캠프에서 느낀 감동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이들은 캠프를 진행한 여진구 선생님을 따라 커다란 도화지에 숲 속 재료들을 붙여서 그림을 만들고, 낙엽 사이에 숨은 작은 곤충을 보면서 탄성을 질렀습니다. 숲속에서 본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과 쉽게 어울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이야말로 어른의 어른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현장에서 매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서울 시내 50개 초등학교에서 뽑은 100명의 어린이에게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걸 한 마디씩 해보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80%의 아이들이 진짜 한 마디씩 건넨 단어는 '자연'과 '환경'에서 퍼올린 것이었습니다.
분명 아이들의 생태감수성은 어른들의 생각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감수성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생태 감수성을 높이는 프로그램이 차고 넘치는 나라들과 비교하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가령 독일은 만 세 살이면 쓰레기처리장을 보여주고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보여줍니다. 다섯 살이면 종이가 어떻게 재활용되는지 알려주고, 날씨가 좋으면 수업 대신 자연과 몸을 부딪게 합니다. 생태와 기후 문제를 정식 교과서로 채택하고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열심입니다. 하지만 우리 경우는 환경 교사 자격증이 '천연기념물'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후 현실과는 정반대인 교육 시스템입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건 아이들이 훨씬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학교 대신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 피켓을 들었던 그레타 튠베리는 고작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최근의 그레타 튠베리는 독일의 석탄 채굴 확대에 반대하고, 전 세계 석유기업 경영자를 향해 새로운 화석 연료 생산을 중단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 미래세대에게 어른들이 물려 준 세상은 훼손되고 파괴된 지구입니다.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속 로빈이 살고 있는 세상,제 다섯 살 손자가 살아갈 세상입니다. 생태감수성을 높이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미래 세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엄벙덤벙 '기후악당' 소리나 들으며 살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제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